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문단 편집) === 시인으로서의 활동 === 파스테르나크는 결국 철학을 포기하고 어렸을 때부터 은근히 동경해오기 시작한 시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전진한다. 그는 1913년 [[러시아]]에 돌아온 후 [[모스크바]] 대학을 졸업하기 무섭게 찔끔찔끔 써오던 시들을 묶어 《매우 어리석은 위선의 가면을 쓰고》라는 이름의 시집을 냈다. 그런데 그의 첫 시집은 그보다 나중인 1914년에 출간한 '''《구름 속의 쌍둥이(Близнец в тучах)》'''로 쳐주는 것으로 보아 전자는 ~~졸업작품?~~시험작이었던 듯하다. 한편 《구름 속의 쌍둥이》는 상징주의적인 색채가 짙다고 평가되는데, 작가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아무것도 표현하지도, 상징하지도 않은 미성숙한 책이라며 ~~[[자폭]]~~ '''후회했다'''. 여러모로 난해하다는 평을 들은 시집을 통해 시인으로 본격 데뷔한 파스테르나크는 같은 해 미래파 시그룹인 <원심력>에 가입하여 그의 세 번째 동경의 대상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를 만난다. 당시 신인이었던 파스테르나크는 어렸을 때부터 책 몇 권에 혁명에 눈을 뜨고 머리에 피도 안 말랐을 무렵 [[볼셰비키]] 위원이 되어 감옥까지 세 번이나 들락날락한 선배 시인(나이는 파스테르나크가 세 살 많다.)인 마야콥스키가 거의 신 같았기 때문에, 존경을 넘어 그를 숭배했고 사랑했다. 그 기간은 1920년 의견 차로 결별할 때까지 6년 동안 지속됐으며, 파스테르나크는 마야콥스키가 점점 본인이 표방했던 낭만주의적 서정성을 혁명적 사상에 의해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저서 《안전통행증》에 서술된 과정을 보면 파스테르나크가 일방적으로 마야콥스키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한 것. 결국 마야콥스키는 그 이후 완전히 정치적이며 선동적인 시를 쓰는 시인으로 자리잡았다. 그렇다고 그가 [[소련]] 체제를 끝까지 옹호했던 것은 아니지만... [[블라디미르 레닌|레닌]]이 죽은 뒤 초기 혁명의 의미가 변질된 소련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던 마야콥스키는 1930년 사회적 압박과 연이은 작품의 실패에 따른 고독을 못 견뎌 자살하고 말았다. 이 때는 마야콥스키뿐만 아니라 많은 지식인들이 목숨을 잃을 때였고, 파스테르나크는 훗날 자기 혼자 살아남은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시인으로만 살기에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1914년부터 16년까지 모스크바의 한 생산업자 아들의 가정교사를 지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막 시작되었을 1916년부터 17년까지는 어렸을 때 다리를 다친 전적 때문에 군에 징병되지 않은 대신 우랄 산맥에 위치한 군수품 공장에서 사무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시집을 여러 권 낸 이후에도 로열티가 영 들어오지 않아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투잡을 뛰었다. 1916년 12월에는 두 번째 시집 '''《경계를 넘어서(Поверх барьеров)》'''를, 1922년에는 세 번째 시집 '''《삶은 나의 누이(Сестра моя — жизнь)》'''를 출간했다. 영명(英名)은 'My Sister Life'. '나의 누이인 삶'이라는 뜻이다. 《삶은 나의 누이》 자체는 1917년에 완성했는데 파스테르나크는 마야콥스키에게 먼저 시를 낭독해 주었고, 마야콥스키는 만족해했다고 한다. 시집의 배경은 1917년 여름 로마노프카와 발라쇼프를 여행하면서이고, 옐레나 비노그라트(1897~1987)와의 만남을 주제로 쓰여있다. 파스테르나크는 이 여인과 친분을 유지하면서 은근스레 마음을 품었던 모양인데, 옐레나에게는 이미 세르게이 리스토파트라는 약혼자가 있었고 세르게이가 1차 대전 때 전사하자 그를 무척 그리워하는 편지를 파스테르나크에게 보낸다. 결국 또 '''차였다'''는 이야기인데, <옐레나에게>라는 시에 '피해야 할 욕설도 그녀에게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다'는 싯구를 넣었다. ~~독한 남자.~~ 그런데 시집의 주요 소재는 이 이야기 자체는 아니고, 주요한 특징은 시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쉽지만 난해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점과, 옐레나 비노그라트와의 이야기를 마치 소설 같은 스토리로 구성하고 있으면서도 시 하나하나에 독립적인 모티브가 주어져 시 본연의 특징을 살렸다는 데에 있다. 그는 단어 선택에 자연물, 특히 식물을 많이 차용했고 계절적인 이미지를 두루 품었다. 이 시는 죽은지 꽤 오래된 미하일 레르몬토프에게 헌정되었고, 마리나 츠베타예바 같은 젊은 시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상징주의를 넘어선 그의 초반 시적 사상을 명확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이 이후로 그의 시는 독창적인 경향을 짙게 띠며 서정성을 띠던 시의 세계를 서사시로 옮기기 시작한다. 그는 같은 해 단편소설 '''《제냐 류베르스의 어린 시절(Детство Люверс)》'''[* 예브게니야라는 소녀의 시점에서 흔한 사춘기 소녀의 심리를 잘 표현한, 아기자기하고도 조금 슬픈 소설이다.]과 '''《툴라에서 온 편지》'''를 발행하였으며, 이듬해인 1923년 후속작인 '''《테마와 변주(Темы и вариации)》'''를 발간하고, 레닌과 관련된 최초의 서사시 '''《고상한 병》'''을 내놓는다. 1925년에는 1905년 러시아 혁명을 다룬 서사시 '''《1905년(Девятьсот пятый год)》'''과 포템킨 전함에서의 봉기 사건을 다룬 서사시 '''《슈미트 중위(Лейтенант Шмидт)》'''의 집필에 착수해 각각 1926년과 1927년에 발행했다. 1924년에 집필을 시작한 운문체 소설 '''《스펙토르스키(Спекторский)》'''는 1931년에, 시집 '''《두 번째 탄생(Второе рождение)》'''은 1932년에 발표하였다. 이 과정은 그의 시적 사상이 명확해지기 위한 과도기에 속한다. 1922년 미술을 전공하던 학생 예브게니야 블라디미로브나 루리예와 첫번째 결혼을 한다. 무라토바라는 성도 가지고 있는데 재혼 후의 성인 듯하다. 그리고 1923년 아들 예브게니를 낳았다. 그들은 중간에 파스테르나크의 부모를 뵈러 베를린에 다녀왔는데, 이것이 그가 부모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다. 1930년 예브게니야는 요양을 하러 독일에 갔는데 파스테르나크는 그녀가 공부를 위해 그 길로 파리를 가기 원했었던 듯 하다. 그런데 그녀가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오고 나니 남편은 나이 40에 이미 '''바람이 났다.''' 새로운 사랑의 대상은 이미 피아니스트인 하인리히 네우하우스의 유부녀인 지나이다 니콜라예브나 네우하우스[* 시집 《두 번째 탄생》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가 그녀에게 헌정되었다.]라는 여자였고, 예브게니야는 1931년에 파스테르나크와 이혼했다. 파스테르나크는 1934년 지나이다와 두 번째 결혼을 했고, 1937년에는 둘째 아들인 레오니트를 얻었다. 친분이 있는 [[조지아|그루지야]]의 시인이자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 자살한 파울로 야시빌리의 이름을 따 파울이라고 지으려 했는데 지나이다가 말려서 아버지 레오니트의 이름을 고스란히 따 지었다고 한다. 사족으로 아들 레오니트는 나중에 나탈리야라는 여자와 결혼해서 옐레나라는 딸과 보리스(...)라는 아들을 두었다. 지나이다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병약한 아들인 아디크 네우하우스도 데려와 죽을 때까지 키워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